본문 바로가기
시사경제이야기

행정 수도 이전과 천도의 역사

by 가나다라abcd 2020. 7. 24.

출처 = freepik

행정수도란?

우리나라는 5년마다 '행정부'를 새롭게 뽑습니다. 대통령의 권한이 크기 때문에 대통령 선거라고 하면 국가 전체의 대표를 선출하는 의미로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행정부의 수장을 선출하는 선거인 것입니다. 입법부의 상징인 '국회'와 국회의원 선거는 대선과 별개로 매 4년마다 '총선'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지게 됩니다. 사법부인 법원, 판사 등에 대해서는 선거가 이루어지지 않고 독립적인 체제로 운영이 됩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모두 서울에 모여있는, 수도권 중심 국가입니다. 국가의 모든 기능이 한 도시에 모여 있으면서 인구 과밀화, 국토 불균형 발전 등의 부작용이 끊임없이 지적되어 왔습니다. 핵심적인 국가 기관이 모두 모여있기 때문에 교육, 교통인프라, 기업 등 사회 전반적인 요소들이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지속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5,000만 인구 중 수도권인 서울, 경기, 인천 지역에 거주하는 인구는 약 2,000만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수도권에 대한민국 인구의 절반 가까운 국민들이 거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상황에서 공급에 대한 문제는 해결하기 쉽지 않고, 수요는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어떠한 부동산 정책을 내놓더라도 그 효과가 미미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1년 당시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인 김대중 후보가 행정수도 이전을 제안하면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됩니다. 이후 군불 때기 식 행정수도 이전이 반복되었습니다. 정부 과천청사가 완공되었지만 이전한 부서가 많지 않고, 과천 역시 수도권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수도권 집중화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일부 정부 부서를 대전 청사로 이전했지만, 규모가 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2003년 노무현 정부에서 본격적으로 행정수도 이전 논의를 시작하게 됩니다. '신행정수도의건설을위한특별조치법안'을 정부가 발의하게 되면서 세종시로의 행정수도 이전이 본격화됩니다. 이 법안은 국회에서 통과되었지만, 헌법재판소의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우리나라의 '수도'라는 개념은 조선시대의 '경국대전'부터 이어져온 '서울'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헌법상에 수도가 서울이라는 문구는 존재하지 않지만, 관습법적으로 수도는 서울이기 때문에, 수도를 이전한다는 해당 법률은 헌법에 합치되지 않는다는 결정이었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는 관습법 국가가 아닌 헌법과 법률에 규정된 법에 의해 체계가 유지되는 '성문법'국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조문에 의거한 판단이 아닌 '관행' 혹은 '관습'에 의해 내린 판단은 당시 많은 논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의해 관련 법률은 효력을 잃게 되었고,  '신행정수도후속대책을위한연기ㆍ공주지역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을위한특별법'이라는 새로운 법률이 통과가 됩니다. 그리고 세종특별자치시는 행정수도가 아닌 '행정중심 복합도시'라는 명칭으로 새롭게 태어나 지금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세종특별자치시에는 국가의 행정기관 대부분이 이전했지만, 각종 교육기관, 기업체, 교통인프라 등이 따라오지 않으면서 도시의 기능이 서울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정부기관 이전 이후 공무원들이 대거 이주했지만, 이러한 이유로 가족단위 전체가 이주하지 않고 공무원 당사자만 따로 이사오는 등 실질적인 도시의 성장이 뒷받침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서울에서 KTX를 통해 매일 출퇴근하는 공무원도 상당히 많습니다. 단지 수도의 기능 중 하나인 행정부를 이전한다고 하여 인구 분산과 균형발전이 이뤄지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현재 세종시에는 기획재정부, 국토교통부, 해양수산부, 환경부, 농림축산 식품부, 보건복지부, 고용노동부, 교육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산업통상자원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등 22개의 중앙행정기관과 21개의 소속 기관, 15개의 국책연구기관, 4개의 공공기관이 이전해 운영되고 있으며 총 2만여 명이 넘는 공무원이 근무하고 있고 35만 명의 인구를 가진 도시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외교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등은 업무의 성격 등에 의해 이전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

세종시 현황

 

천도의 역사

수도는 그 국가의 정체성을 표현하고, 국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만큼 수도는 국가에게도, 국가에서 살아가는 국민에게도 중요한 의미입니다. 수도를 옮기는 것을 역사책에서는 '천도'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도 수많은 천도 시도와 좌절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수도는 졸본성, 국내성, 평양성 순으로 이동해 왔습니다. 졸본성에서 북방민족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기고, 장수왕에 이르러 남진정책을 적극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평양성으로 천도를 실시했습니다. 국가의 생존과 당면 목표, 계획에 맞게 수도를 옮기는 것입니다.

신라의 수도는 경주입니다. 1천 년의 기간 동안 한 곳을 수도로 정한 사례는 굉장히 드문 사례인데, 신라 역시 수도를 옮기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통일 이후 국토 한쪽에 너무 치우쳐져 있는 경주에서, 국토의 중심인 대구로 천도를 시도한 것입니다. 당시의 국경은 지금처럼 압록강-두만강 선이 아닌 대동강-원산 라인이었습니다. 689년 달구벌(대구)로 천도를 시도한 신문왕의 의도는, 왕으로의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신라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경주 기반의 진골 세력을 갈아치우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였습니다. 당연히 기득권의 극심한 반발로 인해 천도의 뜻은 이루지 못했습니다.

고려의 수도는 개성이었습니다. 고려 인종 6년인 1128년, 묘청이라는 승려를 필두로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려는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오랜 기간 권력을 잡고 있던 귀족 세력을 대폭 교체하고, 북방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의도였습니다. 서경으로의 천도를 주장하며 당시 금나라의 연호를 쓰면서 사대적인 입장을 가진 기득권을 비판하고, 독자적인 연호 사용과 금나라 정벌을 주장했습니다.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문신 '김부식'을 대표로 한 개경파는 당연히 이를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고, 묘청은 평양성에서 난을 일으키지만 이는 결국 실패로 돌아갑니다. 역사학자인 신태호 선생은 서경 천도 운동을 두고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고,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으로 규정하며, 서경 천도 운동이 실패로 돌아가면서 고구려적인 진취적 기상이 사라졌다고 애통해하기도 했습니다.

조선은 고려 이후에 건국된 국가입니다. 조선은 건국과 함께 고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곧바로 천도를 실시하게 되는데, 이곳이 오늘날의 서울인 한양입니다.

 

이렇듯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단순히 정부 기관의 위치를 바꾸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애매하게도 행정기관의 대부분이 세종시로 이전했지만, 여전히 청와대는 서울에 있고, 실질적인 수도의 역할은 여전히 서울이 하고있습니다. 수도 이전은 정부 기관의 위치만 바뀌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대표적인 교육, 교통, 문화, 경제, 정치의 중심지가 바뀌는 것입니다. 국가의 정체성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고, 주류 세력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도 이전에 대해 끊임없는 찬반 의견이 나오는 이유일 것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