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민낯, 세계화의 덫
미국은 경제, 군사, 문화 등 다방면에서 세계 최강대국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지만, 이번 코로나 대응에 있어서는 미흡한 점들이 많았습니다. 글을 쓰고 있는 7.4일 현재 미국은 280만 명이 코로나에 감염되었고, 누적 사망자수는 12만 9천 명에 이릅니다. 확진자 및 사망자수는 압도적인 세계 1위입니다. 그간 선진국이라고 믿어왔던 모습과는 동떨어진 수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럼프 행정부의 초기대응 실패로 인한 결과로 보입니다.
한 가지 더 기억에 남았던 소식은, 제조업 강국인 미국이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의료장비를 국내에서 충분하게 만들어내지 못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의료용 마스크의 경우 중국이 전 세계 공급의 1/4를 담당하고 있고, 인공호흡기의 경우에는 싱가포르를 포함한 주요 수출 상위 4개 국가가 전 세계 공급의 50%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발 빠른 대응이 중요한 상황에서 전염병 대응에 필요한 의료물자 수급이 어려워지자, 미국은 국방물자 생산법을 발동해 GM에 인공호흡기 생산을 지시하게 되었습니다. GM은 모두 아시다시피 자동차 제조업체입니다. 애플은 스마트폰 생산량의 80% 이상을 중국에서 생산하고 있습니다. 팬데믹으로 중국의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서, 애플을 비롯한 중국에 스마트폰 공장을 가지고 있는 업체들의 생산 차질이 이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코로나가 중국 전역에 확산되면서, 중국에서 생산하는 와이어링 하네스(배선 뭉치) 수급이 어려워지자 자동차 제조라인 가동이 중단되었습니다. 자동차 제조라인 가동이 중단되자 그와 연관된 많은 사업들(타이어, 자동차 시트 등 완성차 업체에 납품하는 2, 3차 협력업체)의 생산라인 역시 한동안 중단되는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자동차 제조 강국의 이미지와는 너무도 다른 낯선 모습입니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자동차 생산량에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익숙한 발전 모델이 되었던 세계화가 위기상황에서 오히려 위기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세계화와 글로벌 가치사슬(Global Value Chain)
GATT, WTO, FTA 등의 단어를 한 번쯤은 보신 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관세와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 세계 무역기구, 자유무역협정 등 그동안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각종 시스템과 조약들입니다. 2차 대전의 종결, 냉전의 종식, 그리고 운송, 통신기술의 발달로 국가 간 이동과 무역을 자유롭게 하고 관세를 낮추어 문호를 개방하는 흐름이 2000년대 중반까지 이어졌습니다.
국가 간 '분업'체계가 만들어지면서, 선진국은 기술, 금융,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신흥국(이머징마켓)은 풍부한 노동력과 낮은 임금을 이용하여 노동집약적 상품 수출을 통한 성장구조를 만들어 왔습니다. 선진국으로 나아가고 경제가 발전할수록 임금은 높아집니다. 공장을 건설하기 위한 땅값도 상승하기 때문에, 선진국에 위치한 글로벌 기업들의 생산공장이 소속 국가에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세계의 공장은 점차 우리나라에서 중국으로, 중국에서 동남아시아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본국에서 상품에 대한 아이디어, 마케팅 전략, 기초 설계 등을 완성하면 그 다음부터의 생산 공정은 노동력이 값싸고 풍부한 지역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고 이후에 전 세계로 수출합니다. 미국 기업의 고객상담용 콜센터는 미국에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아웃소싱을 통해 아시아에 사무실을 두고 직원들도 현지인을 고용합니다. 임금이 저렴하고, 영어를 사용하는 국가가 많으며, 부지 및 사무실 건설을 위한 비용이 저렴하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세계화는 다른 말로 글로벌 분업화입니다. 기술을 개발하고 상품을 기획하는일, 원자재를 조달하고 노동력을 투입하여 제조하는 일, 완성품이 판매되는 경로는 모두 다른 국가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상품 생산의 흐름이 국가별로 나누어져 있다고 하여 '글로벌 가치사슬'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우리나라 역시 초기에 노동집약적 산업과 수출로 성장을 해왔고, 이제 조금씩 선진국형 산업구조를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보호무역주의의 강화
세계화로 인해 생기는 부작용들은 이 글에서는 논외로 하고, 이렇게 각국의 자유로운 교역과 인적, 물적 이동을 통해 세계화가 완성되어 가고 모든 국가들이 서로서로 연결지점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브렉시트, 유럽발 경제위기, 트럼프 행정부의 보호무역주의 등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각국의 무역 장벽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세계 무역량은 점차 줄어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보호무역의 장벽은 글로벌 가치사슬의 붕괴를 촉진시키고 있습니다. 관세가 다시 생겨나고 있고, 자국 산업의 보호 및 전략산업 육성을 위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이 하나 둘 시작되었습니다. 미국은 중국 제조 2025 계획 저지를 위해 2018년 인공지능 관련 소프트웨어 수출을 불허하기도 했습니다. 특히나 자국의 안보를 이유로 타국의 기업에 공개적인 제재를 가하는 모습(화웨이)은 우리에게 이제 익숙한 광경이 되었습니다. 그간 미국이 자국의 이익 증대를 위해 각국의 시장 개방을 요구하고, 자유 무역과 관세 철폐, 보조금 지급 금지 등을 요구했던 움직임과는 완전 정 반대의 모습입니다.
미중 무역합의 1단계의 핵심은, 2021년까지 중국의 공산품과 농산품에 대한 대미 수입을 늘리는 것입니다. 미국이 지금까지 견지해왔던 자유무역 시대에서 이러한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내용의 합의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중국뿐만 아니라, 미국과 교역량이 많은 대다수 국가에게 요구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트럼프 행정부에서 역점적으로 추진하는 또 다른 정책은 '리쇼어링'입니다. 저렴한 인건비를 위해 공장을 해외로 이전하는 '오프쇼어링'의 반대말로, 해외로 이전한 공장을 다시 국내로 돌아오게 하는 정책입니다. 높아진 임금과 부지값을 상쇄할 수 있는 정부의 각종 세제혜택과 이전비용 지원 등 유인책을 통해 공장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리쇼어링을 실제로 이행한 기업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리쇼어링은 자국의 일자리 창출과 경제 활성화, 그리고 국가의 중요한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서 추진되는 측면이 큽니다. 또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확인된 중국 및 아시아에 대한 과도한 산업 의존도를 낮춤으로써, 자국의 산업 및 안보 발전에 기여하기 위한 목적도 있습니다. 위와 같은 이유로, 앞으로 보다 적극적인 정부의 움직임이 나올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보호무역주의와 우리나라
모두가 공감하는 몇 가지 사실 중에 하나는 '우리나라는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제규모와 수출규모는 모두 세계 10위권에 위치할 만큼 경제대국입니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수출 비중은 40%에 육박하는데, 이는 다른 말로 하면 내수시장이 그만큼 크지 않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수출 중심인 우리나라의 경제구조에서, 국가간 교류가 감소하는 보호무역주의 강화는 분명 향후 경제발전의 큰 걸림돌로 작용할 확률이 높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주요 수출국들은 이미지와는 다르게 기본적으로 탄탄한 내수시장을 중심으로 경제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3억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미국의 GDP 대비 수출 규모는 8%입니다. 인구 1.2억 인 일본의 GDP 대비 수출 규모는 12%대입니다. 세계 최대의 인구 대국인 중국 역시 그 비율이 16% 정도로, 우리나라에 비해 절반 수준입니다.
내수시장이 탄탄하다는 이야기는 글로벌 경제위기가 찾아오더라도 국가의 경제가 어느 정도 자생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아래 자료에서 확인 가능하듯이, 내수 비중이 높을수록 세계 경제 상황과의 상관관계(동조화)가 낮아지고, 경기 변동성이 낮아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세계 경제위기가 발생해도, 그 국가의 경제가 받는 영향이 줄어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약 5천만 명가량의 인구수를 나타내고 있고, 세계 20위권 수치인만큼 작은 수치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경제 대국에 비해 적은 인구, 고령화, 취약한 사회안전망, 양극화된 임금구조 등으로 내수 진작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보이는 보호무역주의의 흐름 속에서, 보다 튼튼하고 안정적인 경제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는 내수시장 활성화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GDP대비 가계 소비 비율이라는 지표가 있습니다. 국가의 경제규모 대비 일반 가정에서 얼마나 많은 돈을 소비하느냐를 측정하는 지표로, 국민들의 실제 재화 소비량을 알 수 있는 지표입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GDP 대비 가계소비 비율은 59%로, 미국 77%, 영국 78%, 일본 70%, 독일 69% 등 주요 선진국에 비해 그 수치가 낮습니다. 국내 소비가 많지 않다는 이야기입니다.
GDP 대비 가계소득비율도 꾸준히 하락하고 있습니다. GDP는 매년 조금씩 성장하고 있는데, 가계소득비율, 즉 가정으로 들어오는 소득은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질 소득이 경제가 성장한 만큼 늘어나지 않기 때문에 소비심리 역시 꾸준히 하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 경제의 발전과 탄탄한 기본기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내수 진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수 진작을 위해 가장 필요한 방법이 실질적인 국민들의 소득을 늘려주는 것인지, 사회 안전망 확충을 통해 과도한 저축 내지 투자에서 소비로 돈이 흘러들어가게 할 것인지는 등 많은 대안이 논의되고 있습니다. 정책적으로도 최저 임금 상승, 기본소득 지급, 규제 완화 등 다양한 대안들이 논의, 실행되고 있습니다. 코로나 이후 새롭게 닥쳐올 보호무역주의와 반세계화 흐름 속에서, 선제적이고 적극적인 경제정책이 보다 필요한 시기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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